커뮤니티

Focus

[시론] 넘어야할 운찰(運札)제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1,002회 작성일 10-10-25 09:49

본문

김인한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 (사)빌딩스마트협회 수석부회장)

  201010131840321880337-2-15794.jpg  
현재 북유럽 등 선진외국에서 현상설계와 건설입찰은 BIM이라는 혁신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한국의 입찰제도도 여러 측면에서 개선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공정한 절차라는 명분 아래 불합리한 측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적격입찰제도는 소위 ‘운찰’이라는 신조어가 붙을 정도로, 시공회사의 수행능력이나 경험보다는 운에 의해 입찰결과가 좌우되는 실정이다.

 물론 적격입찰은 입찰행정의 편의성를 높이고 여러 업체에게 골고루 참여 기회를 부여하는 장점이 있지만, 능력미달 업체의 사업수행으로 인한 품질저하와 국가적 손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는 크게 보면 발주기관 또는 발주제도의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몇 달 전, 싱가포르건설청(BCA) 고위 공무원의 집을 방문해 장시간 한국과 싱가포르 입찰제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제도나 규제보다는 책임과 권한에 입각한 낙찰자 선정 체계가 바로 좋은 결과를 내는 지름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싱가포르와 북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입찰 심사는 전문적인 노하우가 있는 기술공무원이 하게 된다. 심사 공무원은 책임과 그에 부응하는 권한도 갖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가장 적합한 대상자를 선정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낙찰자 선정 방식의 부담을 대부분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교수와 연구원 등 외부 위원들에게 옮기고 있다. 이 경우,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여야 할 교수는 심사와 심의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또한 관련 업체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부작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공공기관이 발주한 학술연구용역에도 신용평가점수와 가격점수만으로 운찰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현행 발주제도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대부분의 대학, 학회, 협회는 신용평가 점수라는 것 자체가 없다. 필자가 목격한 입찰 건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술정책의 중장기계획과 기본지침을 개발하는 연구용역인데, 일정규모 이하라는 이유로, 제안기관의 업무수행능력은 전혀 평가하지 않고, 단순하게 입찰업체의 신용점수와 가격점수로만 선정하려는 경우이다. 연구발주 담당부서에서는 과제수행능력을 평가하고자 했으나 입찰 담당부서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국가정책 연구용역을 유사연구 수행실적이나 발표 경험 등 능력검증은 전혀 없이 가격점수로만 수행업체가 선정이 될 것이다.

 결국 능력없는 다수 업체들이 참가해 운좋은 업체가 낙찰받고 나면 연구를 수준이하로 하거나, 다른 업체에게 하청을 주거나 또는 극단적인 경우에 계약을 포기할 것이다.

 사업목적에 부합하는 올바른 업체가 선정되도록 발주제도가 운영된다면,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업에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업무수행 능력보다는 행운을 바라는 업체들이 공공사업의 주변에 많은 것도 입찰과정에 운찰적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운찰적 요소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한, 견실한 업체의 수주기회 또는 발전기회가 확대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장 능력있는 업체가 선정될 수 있도록 발주담당부서의 권한과 책임을 높여주어야 한다. 발주부서가 행정절차에 얽매여 몸을 사리게 하기보다, 장기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권한을 주는 체계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담당자들이 소신껏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가 행정편의적 공정사회에서 능력 위주의 공정사회로 변화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많이 경직되어 있다. 이는 그동안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생긴 성장통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프트한 행정체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우리의 공공행정 수준이 외견상, 수치상으로는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다고 홍보하지만, 소프트한 면에서는 개선의 여지를 많이 갖고 있다. 여기에는 각종 입찰제도와 행정, 교육제도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포함한다. 사소한 부조리를 막아야 큰 부조리를 예방할 수 있다는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의 깨진 유리창 이론과 같이, 일견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운찰제도부터 정비하는 것은 이에 연계된 많은 건설행정체계를 바로잡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최근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나라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여서 이를 갈망하기 때문이 아닌가, 역설적으로 생각해 본다. 보다 투명하고 정의로운 건설사회를 위하여 현 제도적인 측면의 개선과 더불어, 세심한 행정체계의 개선도 함께 기대를 해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