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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적정공사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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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25-12-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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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건설 현장은 붕괴·추락의 비극으로 얼룩졌다. 고용노동부 통계 기준 3분기 누적 사망자는 210명으로 전년(191명) 대비 7명(3.4%) 늘었다. 전체 산업 사망자(457명)의 46%다. 지난 5년간(2020~2024) 1211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사비 부족이 안전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시공사의 과도한 이윤 추구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최저가 낙찰제와 다단계 하도급이 적정공사비를 갉아먹었다고 주장한다. 정작 “적정공사비는 얼마인가”라고 물으면 답변이 모호하다. 발주자는 예산을 거론한다. 시공사는 원가를 내세운다. 근거가 희박하다.

적정공사비는 사전에 알 수 있는 값이 아니다. 땅속은 파봐야 안다. 기후는 예측을 불허한다. 자재·인건비는 요동친다. 공법·기술과 사업관리 역량에 따른 공사비 편차가 크다. 경제학자 하이에크(F.A.Hayek)는 시장경제 난관을 ‘지식 문제’로 규정했다. 누구도 모든 정보를 알 수 없다. 적정공사비를 단일 숫자로 확정할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공사비 산정의 합리적 절차 부재다.

공공공사 설계가는 품질·안전을 담보하는 최소 추정치다. 계약 부서가 정하는 예정가는 현장 여건을 반영하지 않는다. 관행적 계산 결과인 경우가 잦다. 설계가 100억인 공사 예정가가 85억이 되는 상황은 모순을 유발한다. 설계가가 타당하다면 15억 삭감은 품질·안전 저하 없이 불가능하다. 삭감이 가능하다면 설계가가 과다한 것이다. 어떤 항목을 왜 조정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관행적으로”, “시장 경쟁력을 고려해서”라는 말은 근거가 안 된다. 최저가 입찰을 거치면 낙찰가는 예정가보다 더 낮아진다. 불신 구조다.

적정공사비 관련 질의는 “얼마인가”에서 “어떻게 산정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순수 절차적 정의(pure procedural justice)’ 원리다. 절대 기준을 정의할 수 없다면 공정한 절차를 통해 도출된 결과가 정당한 것이다. 공사비 산정도 과정의 합리성으로 결과의 적정성을 입증해야 한다.

미국 CM-at-Risk 방식과 영국 NEC(New Engineering Contract) 체계는 계약 시점에 완벽한 설계와 정확한 금액을 전제하지 않는다. 계약서는 출발점이다. 시공 과정에서 리스크와 기술 대안을 공유하며 공사비를 조정한다. 가치공학(VE)으로 개선을 유도한다.

미 육군 공병단의 가치공학변경제안(Value Engineering Change Proposal)이 대표적이다. 시공사가 품질·안전을 유지·향상하며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제시하면 발주자는 연방조달규정(Federal Acquisition Regulation) Part 48에 따라 45일 안에 검토를 마친다. 검증된 절감액의 55%를 시공사에 배분한다. 발주자는 예산을 절감한다. 시공사는 수익성을 높인다. 기술 혁신이 촉발된다. 미군은 “얼마가 적정한가”라는 논의를 지양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면 함께 나눈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성과는 수치로 입증된다. 미 육군 공병단은 2017년 기준 62억 달러(약8조원) 규모의 추가 시설을 확보했다. 예산 투입 없이 가치공학 적용만으로 가능했다. 1980~2015년 기간의 국방부 전체 절감액은 550억 달러(약73조원)에 이른다. 승인율은 60% 이상이다. 경쟁 방향을 “누가 더 깎는가”에서 “누가 더 개선하는가”로 바꾼 결과다.

한국 시공사는 개선 제안을 회피한다. 다음 입찰에서 더 낮은 가격을 요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설계가 부실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미군은 개선을 공로로 인정·보상한다. 공무원은 설계 변경에 대한 감사 리스크를 우려한다. 미군은 계약 이후 발견된 개선 기회를 법에 명시했다. 기술검토위원회의 검증과 사후 추적을 통해 오·남용이 확인되면 즉시 환수한다. 60년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제도다.

적정공사비는 초기에 확정되는 숫자가 아니다. 과정이 만들어가는 값이다. 사전에 정확한 금액을 결정하려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정부는 합리적 절차를 만들고 시공사는 품질·안전 경쟁에 나서야 한다. 과정이 정당하면 결과 불신 악순환이 신뢰의 선순환으로 전환된다.


김인호 한국건축시공기술사협회 자문역〈ⓒ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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