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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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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1,071회 작성일 16-03-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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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서울대 산학협력중점교수)

사업 현황이나 현장의 공사 현황을 파악하고 협의하는 장소를 ‘상황실(war room)’이라 부른다. 군대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건설프로젝트는 전쟁터와 같다는 뜻이다. 시간과 돈, 품질과 안전, 그리고 성능과의 싸움이 건설이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도 전쟁을 치른다.

전쟁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다. 건설에서 전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입찰 경쟁이며 다른 하나는 계약 경쟁이다. 입찰 경쟁에서 상생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강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즐겨 쓰는 상생론이다. 계약 경쟁은 발주자와 계약자 간에 일어나는 손익 싸움이다. 이를 포장하기 위해 상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용어의 순화일 뿐이다. 갑을 혹은 상하 관계가 굳어진 국내에서 상생이라는 의미에는 상대방의 양보가 담겨져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반대는 상대방을 모르면 백전백패다. 문제는 상대가 누군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감이 줄어든 국내에서 유일한 생존 돌파구로 해외 시장을 든다. 누구나 공감한다. 경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를 한국 밖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머리는 밖에 두면서 정작 눈은 안을 보고 있다.

해외 시장의 경쟁 상대를 글로벌 기업이 아닌 국내 기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이후부터 4년간 극심한 출혈 경쟁의 상대는 글로벌 기업이 아닌 국내 기업이었다. 2013년부터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한 어닝 쇼크의 진앙지가 최저가낙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외 시장에서의 경쟁자는 보이는 국내 기업보다 보이지 않는 기업이 훨씬 많고 크다. 글로벌 경쟁 기업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적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아닌 머리와 전략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백만 개의 기업보다 나의 경쟁자를 한 자릿수 이하로 만들면 보이기 시작한다. 상품과 시장을 선택하게 되면 경쟁자 그룹이 줄어든다. 보이지 않는 적을 보이는 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선택과 집중이 없으면 하도급자 혹은 인건비에 의존하는 방법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역량 비축을 위해 경쟁력 혁신에 투자하는 노력과 시간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위로는 정부에 너무 많은 주문을 한다. 금융 지원과 인재양성 프로그램 투자를 주문한다. 아래로는 하도급자에게 공사비 삭감을 요구한다. 청년들에게는 인턴 혹은 현장 채용을 통해 인건비 삭감을 떠넘긴다.

지난해 10월 열린 어느 공개 토론에서 국내 10대 상위그룹에 속하는 엔지니어링회사의 한 고위 임원이 국가 지원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공정관리 프로그램을 국가가 공급해주는 것이 업계로서는 피부에 와 닿는 지원이라는 얘기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왜 사기업이 존재해야 하는지 이유를 완전히 부정하는 소리로 들렸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보유하는 건 당연히 기업의 몫이다. 기업에 속한 인재가 사용할 프로그램을 기업이 구매하고 공급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전면 부정한 것이다. 세금으로 기업을 무장시켜 달라는 주문과 다를 바가 없다.

투자와 노력 없는 생존이나 성장은 없다는 게 자본주의의 힘의 원리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은 경쟁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준비하기 전에 목표와 전략이 필요하다. 기업의 규모와 상관이 없다. 국내든 해외든 경쟁하기 위한 역량 비축은 당연하다. 다만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역량이 필요할 따름이다.

모든 걸 다 갖추기란 불가능하다. ‘all(전부)’이 아닌 ‘핵심(core)’을 선택해야 한다. 경쟁의 상대와 협력해야 할 상대에 따라 전략은 달라진다. 선진국 기업과의 경쟁이나 신흥국 기업과의 경쟁, 혹은 협력 전략에 따라 준비해야 할 과제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경쟁 상대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표와 비전, 그리고 전략 수립이 먼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 과정이 있다. 바로 자신의 역량 진단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위치가 보이는 상대를 먼저 가정했다면 글로벌 시장은 포기해야 한다. 준비 없는 전쟁은 필패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준비를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생존을 포기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유일하게 국내 시장에서 ‘운찰제(?)’를 더 강화시켜 달라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준비보다 운에 의해 기업을 유지하겠다는 것과 같다.

정부에 요구하기 전에 먼저 기업의 반성부터 필요하다. 기업의 몫을 먼저 준비하고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는 게 순서다. 지원은 내수 시장이 아닌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게 설득력을 얻는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할 시기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을 보이게 만들어가는 것이 당면 과제다. 해외 시장에서의 경쟁은 훨씬 더 큰 준비와 더 고도화된 역량이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은 더 이상 대안이 없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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