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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로 읽는 현대사](34)남산에 들어설뻔한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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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356회 작성일 23-10-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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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민의의 전당’ 4ㆍ19로 무산…8곳 후보지 거쳐 여의도 확정

공사비 150만원 현장사무실 신축

과열 경쟁속 1원이하 무더기 입찰

후속 90억원 국회의사당 신축공사

연고권 확보 통한 낙찰우위 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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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의사당 완공후의 모습.  국회의사당의 가장 큰 특징은 본관 외부에 자리하고 있는 24개의 백색 화강암 열주와 옥상 중앙에 있는 직경 64m의 초대형 돔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9년 7월31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현장사무실 신축공사 입찰이 공개경쟁방식으로 집행됐다. 앞선 7월17일 국회의사당 신축공사 기공식이 있은지 14일 만이다. 공사비 150만원인 이 공사 입찰은 1원 이하짜리 입찰서가 무더기로 나오는 등 경쟁이 치열했다. 한 신문은 당시 ‘‘그림의 떡’된 황금공사’라는 제하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개찰결과는 현대와 대림의 조인트벤처팀에 낙찰됨으로써 이에 참가했던 많은 건설업자들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는데, 이들은 황금의 공사를 놓친 것이 무자비한 현실의 탓이라고 풀이하면서 자위. 흥미있는 얘기는 참가한 대부분 업자들이 한은발행 최저화폐단위가 10전이기 때문에 10전짜리 현찰까지 지참했는가 하면 어떤 업자들은 최저투찰의 유효가격을 알고자 재무부에 문의까지 했다는 것’

150만원짜리 공사입찰이 이처럼 과열된 것은 후속으로 90억원에 가까운 국회의사당 신축공사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현장사무실 신축공사를 수주해 연고권을 확보하면 본공사인 국회의사당 신축공사 수주가 수월해진다. 당시 연고권은 수주경쟁에서 전가의 보도나 다름이 없었다. 연고권이 있는 업체에 공사를 밀어주는 게 관행이었던 것이다. 이런 관행은 1990년대 담합으로 규정돼 사라졌지만 한편으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연고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우선의 조건은 입찰로 나온 공사 주변에 현장을 갖고 있느냐였다. 현장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장비와 인력이 배치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공사를 수행하는데 다른 업체들보다는 비용 등의 면에서 경쟁우위에 있는 것이다.

본공사인 국회의사당 신축공사는 결국 지명경쟁입찰에서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컨소시엄에 87억9500만원에 낙찰된다. 하지만 이 입찰은 추후 담합의혹에 휩싸인다. 재무부는 1972년 3월 각 발주관서에 담합조사를 지시하는데 조달청이 발주한 국회의사당 신축공사도 대상에 포함됐다. 재무부는 당시 담합방지와 무모한 덤핑입찰 방지를 위해 평균가낙찰제를 채택했다. 그런데 지명입찰의 경우 다수인이 입찰에 참가했는데도 낙찰된 1개사만이 예정가격의 80% 이상의 금액인 유효가를 투찰하고 나머지 업자는 유효권외를 투찰함으로써 담합인상이 짙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조사는 무위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회의사당 신축공사 담합과 관련해 어떤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확정한 것은 1968년 2월14일이다.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는 이날 여의도에 대지 20만평, 연건평 3만2300평의 새 국회의사당을 1969년 착공해 9년 안에 완공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김수근 건축가팀이 완성한 여의도 마스터플랜도 나왔다. 15년 후를 내다본 마스터플랜은 섬 전체를 크게 3개의 남북축으로 나눴다. 맨 서쪽을 국회축으로 해 섬 서북단 양말산에 국회의사당을 세우는 계획이다.

1968년 말 새 국회의사당의 기본설계가 나왔다. 미국MIT의 건축대학장인 베아스키 교수와 재미건축가인 박관두씨의 자문을 받아 나온 기본설계는 지하 2층, 지상 6층의 본관과 좌우에 10층짜리 의원회관과 도서관(5층), 그리고 5개의 부속시설을 합쳐 총건평 3만2000평 규모다. 장차 양원제에 대비해 민ㆍ참의원과 사무처 등 지원기구가 들어갈 본관 건물은 화강석으로 치장한 현대양식이면서 한국적 건축미를 가미했다. 지붕은 심플한 평면식으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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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15일 골조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상량식이 열렸다.                                                                                                        사진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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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1일 준공식이 열렸다. 완공 후 국회의사당 전경이다. 자연하천 모습의 한강이 보인다.                               사진 국가기록원

기본설계가 확정된 것은 다음해 5월이었다.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는 의사당의 기본설계를 일부 변경해 1969년 5월12일 확정했다. 이때 당초 평면지붕이 르네상스식 돔형식으로 바뀌었다. 서양식 건물에 돔이 없어 웅장미가 떨어진다는 국회의원들의 비판이 수용된 결과다. 국회의사당 건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69년 제헌절인 7월17일 기공식이 열렸고 1971년 5월11일에는 본관 정초식이 있었다.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은 조인트 벤처 형식으로 전 공정을 함께했다. 1973년 5월15일 골조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상량식이 열렸고 2년여 후인 1975년 9월1일 준공식이 개최됐다.

현대건설은 60년사에 국회의사당 건축공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회의사당 본관은 대형 석조 건물로 석공사의 공사량이 매우 방대했다. 화강석의 작업면적만 하더라도 4만5668㎡에 이르렀고 대리석의 경우 2만6925㎡나 될 정도였다. 국회의사당 본관이 신축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그렇게 많은 석공사량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충분한 연구를 거쳐야 했고 기술자문을 충분히 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회의사당의 가장 큰 특징은 본관 외부에 자리하고 있는 24개의 백색 화강암 열주와 옥상 중앙에 있는 직경 64m의 초대형 돔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외형상의 미뿐만 아니라 특히 본관의 기둥 사이 간격이 30m나 되고 드럼과 돔 부분의 지름이 60m에 달해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둥 사이에 설치하는 철골구조의 경우 처짐을 방지하기 위해 품질관리를 철저히 시행했다. 돔의 높이는 옥탑 3층 바닥에서 18m나 돼 마치 거대한 입체가교를 설치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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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으나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해 무산됐다.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남산국회의사당 모형 자료.                                                                                                                                                                                                              사진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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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15일 남산광장에서 국회의사당 신축기지 기공식이 열렸다.                                                                                  사진 국가기록원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들어서기까지 겪은 우여곡절도 얘깃거리다. 국회의사당 신축이 처음 거론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말경이다. 당시 국회는 태평로에 있는 현재의 서울시 의회건물을 의사당으로 썼다. 건물이 협소한 데다 별도의 국회의사당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국회운영위원회는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신축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9년 5월15일 남산광장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그해 11월 현상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된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을 설계도안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1960년 일어난 4ㆍ19혁명으로 남산 국회의사당 건축계획은 무산됐다. 정부는 그해 6월 남산에 건설 중인 국회의사당 신축공사를 중지하고 종로구에 있는 종묘를 새로운 부지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중지 이유는 수도를 놓는 비용이 비싸고 행정ㆍ사법부를 굽어보는 자리여서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대신 종묘건물을 약간 북쪽으로 이전시키고 이 자리에 국회의사당을 짓되 설계도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도 얼마 가지 않아 백지화됐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최고회의상임위는 1963년 5월28일 국회의사당 건립 자체를 없던 것으로 결정했다.

새 국회의사당 건립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에 들어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5월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국회가 양원제로 개편될 경우를 고려해 국회의사당을 역사적인 건물로 크게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회사무처는 후보지 물색에 나섰고 사직동 공원 일대, 서울중고등학교 일대, 종로3가와 4가 사이 종묘 일원, 철도청과 서빙고역 중간지점, 해병대사령부 일대, 제2한강교에서 양화교를 지나 김포공항 중간지점, 제3한강교일대, 컨트리클럽 자리 등 8곳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자리는 이들 8곳 후보지가 아닌 여의도로 최종 확정됐다. 여의도 개발과 맞물리면서다.

1960년대 초 정치적인 격변이 없었다면 국회의사당은 남산에 들어섰을 것이다. 상상을 해보자. 남산 중턱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국회의사당. 이곳에서 여야는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박질이다. 이를 보는 국민의 속은 지금보다도 더 터지지 않을까. 서울 도심에서 고개만 들면 국회의사당이 눈에 들어올테니 말이다. 국회의사당이 그나마 여의도에 들어선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참고 현대건설 60년사 매일경제 조선일보 뉴스라이브러리>    <대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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