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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불안을 강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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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산업관계연구소 댓글 0건 조회 1,339회 작성일 10-02-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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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식 정경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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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만난 건설사 임원은 요즘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이다. 지난 한 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힘들 것은 예상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헤쳐 나갈 각오도 있었다. 성과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차원이 다르다.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어서다. 비단 그 임원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한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한다. 건설을 둘러싼 환경이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공공부문은 물량이 크게 줄고 민간 주택시장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확실성도 더 커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언제 확실한 때가 있었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건설경기가 호황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을 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단편적으로 경영여건이 나빠질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얘기다.

 불안과 두려움은 사뭇 다르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안다. 반면 불안의 대상은 상상된 위험물이고 주관적이다. 두려움은 대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대항할 수 있다. 불안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인은 여러가지다. 개인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불안과 무기력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 분위기에도 큰 원인이 있다. 겁을 주고 협박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불안과 무기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심리학과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ligman) 교수가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바닥에 전류가 흐르는 장판을 깔고 칸막이를 만든 뒤 양쪽에 번갈아가며 전류를 흘려 보낸다. 처음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칸막이를 넘나든다. 하지만 양쪽에 전류를 흘려 보내거나, 개가 가는 쪽마다 전류를 흘려 보내면 어느 순간 칸막이 넘는 것을 그만둔다. 낑낑거리며 고통을 감내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위협이나 위험에 대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필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한숨을 좀 돌리려고 하니 출구전략은 아직 멀었다고 막아선다. 나아가 더블딥(이중침체)이 곧 온다고 다시 엄포를 놓는다. 누가 누가 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더 비관적으로 말하나 경쟁을 보는 듯하다.

 비관적 시각도 물론 필요하다. 불안이 위기상황의 경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로벌금융위기 이후에는 도를 넘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전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최악의 상황을 주입하기에 바빴다. 충격적이지 않으면 시선을 끌 수 없어서다. 얄팍한 계산도 깔렸다. 나쁘게 말했다 좋으면 그만이다. 굳이 과거를 들춰 질책하지도 않고 결과가 나쁘면 ‘거 봐라 내말이 맞지’하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다. 반면 장및빛 전망을 내놨다가 틀리면 나쁜 결과에 대한 덤터기까지 써야 한다. 기회주의적 불안 전도사들이 판을 쳤다.

 모레면 입춘이다.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로, 새해의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두꺼운 얼음 아래에도 시냇물이 흐르고 겨우내 움츠렸던 나뭇가지도 물이 오르는 때이다. 아직도 위기의 터널 속인지,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빛과 희망을 이야기할 때이다. 방송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는 미실과의 논쟁에서 희망의 정치를 강조하며 “희망은 피곤과 고통을 감수하게 한다”고 했다. 물론 구체적 비전을 가진 희망이다. 2010년의 선덕여왕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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