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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예산절감, 그건 '갑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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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1,087회 작성일 13-07-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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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관과 달리 집행자인 발주기관들이 내놓는 보도자료라야 딱히 특별한 게 없다. 대개 착공이나 준공관련 자료인데, 이미 정책기관에서 발표한 시행계획이 대서특필된 터라 언론의 주목을 받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축하 테이프를 끊는 고위층들을 잡은 천편일률적인 사진기사와 함께 사업시행으로 인한 효과가 단신기사로 처리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따라서 집행기관인 발주기관들은 보도자료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가 한창인 2000년대 들어 발주기관들이 공을 들여 내는 보도자료가 생겼다. 바로 예산절감 실적이다. 집행하는 사업별로 설계심사나 계약심사를 통해 얼마의 예산을 줄였는지를 실시간 홍보했다. 연말에는 전체 책정된 사업예산 대비 얼마의 예산을 절감했는지를 종합해서 내기도 했다. 이때 보도자료를 내는 기관은 보통 10% 이상 줄인 기관들이었다. 그 이하는 성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발주기관들의 예산절감은 최저가제에 의해 만들어진 단가를 적용해 해가 거듭될수록 단가가 하락하는 구조인 실적공사비제도를 통하거나 설계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설계사가 용역을 통해 책정한 사업비를 2중, 3중으로 삭감하면서 이뤄졌다. 발주기관이 한 번 손을 대고 다시 조달청과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등을 거치면서 사업비가 계속 깎이는 구조다. 여기에 입찰참가사들의 가격경쟁을 부추겨 덤핑으로 공사를 맡기고 큰 폭으로 사업비를 줄였다. 정부와 발주기관들의 예산절감은 이런 구조였다.

 정책기관이든 집행기관이든, 정권의 의중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난 정권까지만 해도 경쟁적으로 생산됐던 발주기관들의 예산절감 보도자료는 현 정부 들어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현 정부는 주요 정책의 하나로 경제민주화를 설정했고 갑을관계의 정상화를 주요 현안으로 채택했다. 더욱이 우유회사의 대리점 관리에서 촉발된 갑의 불공정한 행위는 ‘갑질’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면서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불공정 갑을관계 개선을 위한 민ㆍ관 합동 TF를 만들어 발주기관들의 불공정한 공사비 삭감 관행을 개선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TF에서는 이미 일부 발주기관들이 사업비가 늘어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임의로 적용해온 설계조정률을 폐지하거나 보완하기로 결정했고, 실적공사비 제도도 현실에 맞게 적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지금 TF에서 논의되는 사항을 볼 때 앞으로 더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과거 10여년 동안 발주기관들이 세금을 아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예산절감 실적은 결국 수퍼갑이 힘없는 을에게 해된 갑질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정부 사업은 기획이 되면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치고 여기서 통과되면 타당성조사, 조사, 설계를 거쳐 시공된다. 또 사업비가 책정되기 위해서는 정부 검토를 거쳐 국회의 여러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30일 한 신문이 보도한 기획기사에 따르면 지난 2008~2012년까지 5년간 예타를 받은 291개 사업을 전수조사한 결과 경제적 타당성에서 낙제점을 받고도 추진된 사업이 3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이나 타당성조사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이 새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발주기관들은 그동안 설계와 시공 사이의 설계단가와 낙찰단가를 낮추는 예산절감에만 치중해 왔다. 힘 있는 청와대나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해 불필요한 사업에 수십조원을 낭비하면서 갑의 지위를 이용해 쉽게 예산을 삭감할 수 있는 곳에서 수조원을 줄여 놓고는 세금을 아꼈다고 생색을 냈던 것이다. 그 피해를 을인 국민에게 감내시키면서 말이다.
권혁용 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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