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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독배(毒杯) 강권하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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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1,061회 작성일 15-07-0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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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식 산업1부장

고릿적 군대의 한 장면이다. 고참이 졸병에게 돈 1000원을 주면서 라면과 통닭, 사이다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난감한 표정으로 내무반을 나서는 졸병의 뒤통수에 회심의 한마디를 또 던진다. 거스름돈 500원도 잊지 말고 챙겨오라고. 요즘 세대들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다. 고참이 졸병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그렇거니와 1000원의 몇 배에 달하는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까지 가져오라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다.

 요즘 이 같은 불합리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곳이 있다. 공공공사 입찰이다. 턱없이 낮은 공사비를 책정해 놓고 공사를 따가라고 한다. 턴키(설계ㆍ시공 일괄입찰)나 기술제안 등 기술형 입찰에는 가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높은 스펙이 정해지기도 한다. 라면뿐 아니라 통닭에 사이다까지 얹은 구조인 셈이다. 낮은 공사비나 짧은 공기 등으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거나 하자가 발생하면 고스란히 시공사가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거스름돈까지 내줘야 하는 구조와 다르지 않다.

 부족한 공사비가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입찰을 보면 누군가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고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뿐만 아니라 내 돈을 써서라도 지시를 따르는 게 군대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더기 유찰사태가 나타났다. 공사비가 박한 공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류가 형성되면서 지난해부터 공고된 기술형 입찰 가운데 절반 정도가 1차례 이상 유찰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졸병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발주처의 태도다. 이어지는 유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고를 내고 또 내는 것이다. 기술제안 방식으로 추진되는 청주시 국도대체우회도로(북일∼남일1) 공사의 경우 5번째 유찰됐다. 폐광을 포함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난공사 노선임에도 일반 도로와 비슷한 수준으로 공사비가 책정됐다. 이 수준이라면 20% 이상 적자가 난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북미 대륙에 ‘한류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추진하는 뉴욕관광문화센터 건립공사(최저가낙찰제)는 지난달 1개 업체도 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PQ)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 7번째 유찰을 기록했다. 지난 2013년 초 첫 공고 이후 2년 반 동안 신규, 재공고 등이 이어지며 최다 유찰 기록을 세웠다.

 공공공사는 ‘독이 든 성배((聖杯)’로 인식됐다. 최저가낙찰제, 실적공사비 등으로 따면 딸수록 기업의 생명을 재촉한다는 의미에서다. 그 독을 기꺼이 마시기도 했다. 독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된다는 말을 믿었고, 그 독을 견딜 만한 체력도 있었다. 성배라는 말에는 국가사업을 위해 희생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제는 독이 허용치를 넘어섰다. 체력도 바닥이다. 지금은 독배(毒杯)일 뿐이다. 공사 한 건을 잘못 수주하면 기업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공사 참여를 종용하는 것은 정부가 건설사들에 독을 마시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유찰을 거듭하고 있는 공사들은 국책사업이거나 지역 현안사업이다. 적정공사비니, 낙수효과니 하는 부수적인 영향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연되면 될수록 손실이 커질 뿐이다. 사회적 편익이나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공사비를 책정해 주는 것보다 몇 배의 비용을 더 치르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나 발주처 관계자도 당연히 알 것이다. 다만, 모른 체할 뿐이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정부와 발주처를 보면 터무니 없는 지시로 졸병이 골병들어 죽어도 제대만 하면 그만이라는 파렴치한 고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만 나온다.

박봉식기자 par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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