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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첩> 그 현장에 '甲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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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희대학교 댓글 0건 조회 857회 작성일 15-08-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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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사 현장소장은 스스로 목을 맸고, 하청사 사장은 분신자살했다. 둘 다 유서에 ‘공기 지연 문제’를 언급했다. 원청사의 현장소장은 자조적인 말투로 ‘어쨌든 내 탓’이라고 했고, 하청사 사장은 분노에 차 ‘내 탓 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연이은 자살사건이 발생한 평택미군기지 사태를 기획취재하며 가장 먼저 기자를 난감하게 했던 것은 이번 사건의 의외성이었다.

 처음 취재에 들어갈 때는 분신자살의 사회적 의미를 감안해 ‘원청사 갑질’을 주장한 하청사 사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취재를 거듭할수록 이 사태의 핵심이 ‘갑질’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미 육군 극동공병단(FED)은 갑질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약자가 약속한 성과물을 정확히 단계별로 요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식으로 저가 수주한 원청사는 미국식 품질 요구에 당황했고, 한국식 관행에 익숙한 하청사는 발주처의 공사 중단 명령에 쩔쩔맸다. 공기 지연에 대한 변명이 발주처의 ‘갑질’이 될 수 없었고, ‘저가수주’란 변명은 너무 구차했다.

 평택 현장에서 원청사의 역할은 FED 품질관리에 대비해 하청사에 정확한 작업지시를 내리고 공기를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청사는 한국식 관행대로 설계 도면을 하청사에 건넨 이후 ‘공기 준수’만 독촉했다. 또한 하청사들은 FED 시스템에 적응을 하지 못해, 전문건설의 ‘전문성’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은 ‘을질’에 있었다고 본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건설사인 원청사부터 하청사들까지, 선진국형 관리 시스템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평택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전문건설사 관계자들은 분신자살한 하청사 사장의 처지에 공감하며 하나같이 분노했다. 그리고 원청사 관계자들은 내역입찰 계약으로 발주한 국방부에 분노했다. 하지만 이 분노는 정당한 것일까.

 현재 우리 건설업계는 새로운 산업구조를 만들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은 옛 구조 속의 나 또한 새롭게 바꾸는 일을 포함한다. 자살한 현장소장과 하청사 사장의 처지에 각자 입장별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들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을의 책임을 덮는 건 고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취재과정에서 한 업체의 임원이 말했다. “이번 사업을 한국 발주처가 관리감독했다면, 건설사들은 어떻게든 공기를 맞췄을 것”이라고. 그 순간 씁쓸해졌다. 그가 말한 ‘어떻게든’이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기 때문이고, 동시에 고인들을 생각해서라도 평택사건의 교훈이 이 정도 깨달음에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최지희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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